본문 바로가기

사찰순례

부처님 10대제자 석상(석굴암 본존불 옆벽)

 

석굴암 본존불(국보제24호)

 

 

 

십일면 관세음 보살상

전통 조각사에서 최고의 보물인 경주 토함산 석굴암 답사의 백미는 단연 본존불과 더불어 십일면 관음보살상이다. 미술사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친견한 답사객들에게 변치 않는 '신라의 연인'으로 자리잡은 이 보살상은 동양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조각'으로 손꼽는다. 주실의 중앙부 본존상 바로 뒤에 한몸처럼 직선상으로 놓여 평소 바깥 유리벽에서는 볼 수 없기에 신비로운 감흥은 각별하다. 잘룩한 허리에 가녀린 천의를 걸치고 오른손으로 옷의 영락을 살짝 들어올려 상큼한 액센트를 주었다. 왼손에 감로수 담긴 정병을 든 우아하고 고고한 몸체. 세겹의 목걸이와 가슴, 배를 가르는 구슬띠와 고리 장식, 팔찌, 발찌 등의 기기묘묘한 장신구 조각들은 보는 이를 황홀경에 몰아넣는다. 중생들 애원성을 듣고 바다같은 자비심으로 고통을 구제하는 보살이니 후대인들이나 그 팍팍한 화강암면에 공들여 돋을 새김을 한 신라 석공의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터다.

십일면 관음상은 8세기 통일신라 때 조각이나 석굴암이 20세기 초 세상에 알려진 까닭에, 여느 유산과 달리 묵향의 기록들은 근현대기 문인들 자취로 넘쳐난다

가전연은 중인도의 서쪽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웃제니의 출신이다.

불서의 기록에 따르면, 웃제니는 부처님이 전연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도성의 하나로 들어지고 있다.

웃제니의 왕은 부처님과 불교 교단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가능하면 부처님을

자기 나라로 초청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도 그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그 개략만이라도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왕은 일곱 명의 사신들을 사위성의 기원정사로 파견했다.

그 일곱 명 가운데 한 사람이 가전연이였다.

그는 아버지가 왕을 보필하는 스승으로 있었기 때문에 일곱 명 속에

끼어 들어 갈 수 있었다.

가전연은 부처님을 만나자마자 그대로 출가하여 불제자가 되었다.

가전연은 수행한 후 귀국하여 왕으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케 했다.

왕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출가시켰다.

論議第一 가전연 존자

가전연은 불법에 귀의한 뒤 뛰어난 언변과 말솜씨로 논리 정연하게 상대방의 주장을 꺾음으로써 논의제일이라고 칭송받았다.

경전 곳곳에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외도들과 토론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가전연은 바로 이들 외도와의 교리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가전연은 석굴암 제자상중 향하여 좌측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다. 왼손을 옷속에 넣은 채 오른손을 올려 첫째, 둘째 손가락으로 둥근원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을 죽 펴들어 설법하는 모습이다. 얼굴은 왼쪽으로 약간 돌려 쳐든 채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며, 두 발을 활짝 밖으로 벌려 버티어 서서 굳은 의지를 내 보이고 있는데, 상대방과 자신 있게 논쟁하는 가전연 존자의 특징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가전연

(수보리- subhuti를 음사하여 선길(善吉) 선현(善現)이라 번역한다. 수라-바스디-시의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기원언정사를 기
증한 급고독장자의 아우인 수미나의 아들이다.그는 기원정사에서

석존의 제자가 되었다.부처님으로 부터 무쟁제일(無諍第一)의 제
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는 후대 공(空)을 이해 하는데 제1로 꼽혔
고 해공(解空) 공생(空生)이라고도 불렸다. 반야경전 중에서도

부처님의 설법의 상대로써 언제나 등장하고 있다. 그의 시구가 단 한구절만 전해지고 있는것은 상좌부(上座部)에서 볼 때 그는 이단
자(異端者) 였으나 후대의 대성불교에서는 그를 전면에 나타나게

한것 같다. )

수보리



아난 존자


다문제일 아난(多聞第一阿難)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정반왕이 아난다(Ananda;기쁨,환희)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난은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가 되어 고향인 카필라 성으로 돌아왔을 때 출가한다.
당시 그의 나이 8세 였지만
석가족의 자연스러운 출가 분위기에 따라
사촌들과 더불어 교단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그는 생김새가 굉장히 출중한 미남이었다.
이런 외모를 지닌 탓으로 많은 여인들로 부터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아난에게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몇가지 일이 벌어진다.
①부처님의 시자로서 그 인류의 스승이 열반에 들 때까지 보필한 일.
②여인의 출가를 부처님께 간청하여 받아낸 일.
③경전 결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
가장 뛰어난 공적은 경전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편찬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을 외워 보인 뒤
거기에 참가한 500나한들의 지지를 받고
정식으로 경을 성립시키는 주역으로 등장한다.
오늘날 경전의 첫머리에 상요구처럼 따라 다니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말은
바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그 말씀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전편집 과정에서
애초에 마하가섭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해
참가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되는 참담한 운명에 처한다.
그 후 아난이 번뇌를 모두 없앤 뒤 경전 편집에 참여 하였다.
석가모니불의 십대제자상에서나
여러 후불탱화에서 아난은 머리를 단아하게 깍은
젊고 용모가 바른 비구의 모습으로
부처님 우측에 등장하고 있으며
마하가섭은 그 죄측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다.
석굴암에서 아난은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 맨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다.
두 손은 단정히 깍지를 낀 채 가슴에 대고 있으며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는 젊은 비구로서
옷깃을 세운 미남형 비구의 모습이다.  
갸름한 얼굴, 단아한 이목구비,
상큼한 미소에서 단박 아난존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25년간 부처님의 시중을 들며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제자였다.
그는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으며,
기억력도 뛰어나,
훗날 불교 성전을 편찬할 때,
들었던 법문 내용을 암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난탄

 

 

마하목건련(Mahamaudgalyayana)  

神通第一. 마가다국 왕사성 밖의 콜리타촌 사람으로 바라문족 출신이다. 사리불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죽림원에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신통력이 가장 뛰어났던 목건련은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였다.
어느날 목건련 존자가 천안통으로 지옥을 보니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고통받고 있 는 모습을 발견했다. 효심이 지극했던 목건련 존자는 바로 부처님께 어떻게 하면 어머니 를 구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물어서 어머니를 천도했다고 한다. 同 제자품에는 "神足 이 輕擧하여 十方에 飛到함은 대목건련 비구가 제일이다."라고 되어 있다. 사리불과 대목건련은 10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上道의 제자였지만 부처님보다 먼저 입 멸하였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의 교단사는 자연 그 다음 서열의 가섭에게 돌아갔다.

 

사리불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 舍利佛, 奢利弗로도 적는다. 바라문 출신으로서 왕사성의 북쪽 부근에 있는 마을에서 출생. 육사외도의 한 사람이며 회의론자인 산자야(sañjaya)의 제자였으나, 목건련과 함께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데리고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집단으로 개종했다. 석가모니의 아들인 나후라의 후견인이었으며,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설법할 수 있을 만큼 신임이 두터웠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멸했다. 갖가지 지식에 해박하고 통찰력도 빼어나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간주되었으며, 지혜제일(智慧第一) 또는 법왕자(法王子)라고 호칭되었다.

마하가섭

마하가섭(摩訶迦葉, 산스크리트어: Mahākāśyapa)은 고타마 붓다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1] 가섭 또는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대음광(大飮光) 또는 대구씨(大龜氏)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고타마 붓다의 신임을 받아 제자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2] 고타마 붓다반열반에 든 후 비탄에 빠지거나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으며,[2] 제1회 불전 결집을 지휘하였다.[3]

영취산(靈鷲山)에서 고타마 붓다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故事)가 전해진다.[2] 선종에서는 마하가섭을 선법(禪法)을 받아 이어준 제1조로 높이 받들고 있다.

 

 

아나율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 석가족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사촌 동생이다.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서 졸다가 질책을 받고서는, 눕지 않고 항상 앉아 수행하기를 오랫동안 지속하여 실명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천안(天眼)을 얻었고, 천안제일이라고 불렸다. 부처님의 신뢰를 얻어 최후의 여행에도 동행했다. 부처님이 입멸하자, 장례를 치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바리(優婆離)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의 한분. 석가족의 이발사였으나 석존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십대 제자가 되었으며, 특히 계를 엄하게 지킨 존자라 해서 지계제일이라고 한다. 교단 규율 가운데 그의 의견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가 많았다고 한다

 

 

부루나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 富婁那로도 적는다. 가비라성 부근의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정반왕의 국사(國師)의 아들로서 석가모니와 나이가 같았다. 부처님이 성도한 소식을 듣고서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귀의하였다. 득도한 후, 각지를 떠돌며 포교에 전념했다. 교묘한 언변으로 교화하는 일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고 불렸다.

라후라(羅

 

라후라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아들. 어머니는 구이(俱夷). 석가(釋迦)가 성도(成道)한 뒤에 출가(出家)하여 제자가 됨. 석가의 큰 열 제자 가운데 한 사람. 밀행(密行)에 제일. 인도의 마족(魔族)은 아수라의 신으로 섬긴다. 전설에 의하면, 라후는 신으로 변신하여 유해교반(乳海攪拌)에 의해 얻어진 감로(甘露)를 훔쳐 마시려고 하였다. 그런데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이 이를 발견하고 비슈누신(神)에게 알려 비슈누는 라후의 목을 잘랐다. 일신과 월신에 대해 원한을 품은 라후는 그때부터 늘 해와 달을 삼키게 되었으므로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이 생겼다고 한다. 라후(羅?), 라운(羅云), 라호(羅?)라고도 한다.

 

석굴암 사천왕상

광목천왕(남방세계)

증장천왕(서방세계)

 

다문천왕(북방세계)

지국천왕(동방세계)

 

 

 

1. 토함산

   석굴암의 자비로운 본존불의 시선과 동해 떠오르는 해와 일직선상에 즉 죽어서 호국용이되어 영원히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다.

구름과 안개를 토함하고 일월성신이 토함하는곳, 우주의 중심이며 종교와 예술과 자연 그리고 한 민족의 염원이 아름다운 정신으로 승화되어 굳어진곳이 바로 토함산이다.

 

2. 석굴사원의 유래

   석굴사원은 인도에서 더위를 피하고 수도에 필요한 고요함을 얻기 위해 굴속에 사찰을 건립하고 거처하며 수도를 한 것이 그 유래다.

그 후 중국으로 전해져 4세기 후반경에는 돈황, 운강, 용문등에 조영되고 그 규모가 웅장하고 탑 대신 불상을 안치했다.

우리나라에는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후기에 전래되었다.

 

3. 석굴암의 창건

   경덕왕10년 (751) 전세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중창 했으며 혜공와10년(774) 김대성이 죽은후 나라에서 공사를 완성 하였다고 한다.

 

4. 석굴암의 보수

   일본인에 의해 1912~1915년에 보수를 하였으나 사전연구 부족과 건축원리를 이해하지 못해 외면상 수리는 되었으나 오히려 파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본존불 아래 석굴내 지하수가 모여 밖으로 배출되는 수로장치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이것을 막아 버렸다.

지하수로 차가워진 돌들에 실내 수분이 물방울로 맺혀 밖으로 자연배출 되게 한 신라인들의 과학적인 구조를 어찌 일본인들이 이해하였으랴? 

 

냉장고에서 꺼낸 물병을 밖에두면 병 주위에 물방울이 서리는 현상과 같은 원리 입니다.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 수백년을 지켜온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복구할수없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불상의 배치도 임의 변경되었고 석굴외곽 돔에 1m두께의 시멘트를 구축하여 석굴 내부에 다량의 수분과 누수현상을 초래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 후 석굴암은 해방 뒤 혼란한 사회속에 주목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 우리 손으로 목조에 기와를 덮은 전실이 설치되고 다시 돔 위에 공간을 두고 이중 시멘트로 발라놓고 습기제거장치를 하고 외부 습기를 차단하기위해 유리벽으로 막아버렸다.

그후 석굴암은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영원한 불구자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5. 석굴암의 구조

   석굴암은 규모면 에서는 인도나 중국에 따를수 없으나 예술적인 가치, 내포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축성에 적용된 고도의 과학성은 세계 그 유래를 찾을수가 없다.

석굴은 전실, 비도, 주실,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원지방설 즉 전실의 네모는 땅을 나타내고 주실의 원은 하늘(우주)를 나타낸다.

땅(사바세계) 과 하늘(부처님의 세계)을 비도가 연결하고 있다.

석굴은 신라불교예술의 전성기에 건축된 종교, 건축, 기하학인 구조와 균형, 예술, 수리 등이 잘 조화되고 명암, 명도, 착시현상 등을 잘 고려한 최고의 걸작이다.

천정은 아치형으로 본존불 바로위에 연화문을 새긴 큰 천개가 있다.

이 천개는 석굴암을 지을때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천신이 다시 붙였다는 김대성의 꿈대로 세줄의 균열이 있다.

 

6. 석굴암의 각 상들

  (1) 전실의 팔부신중상

  (2) 금강역사상(인왕역사상)

  (3) 비도의 사천왕상

  (4) 본존불

  (5) 11면 관음보살상

  (6) 천부상(대범천과 제석천)

  (7) 보살상

  (8) 10대제자상

  (9) 감실제상

각각의 상들은 입으로 후~ 하고 불면 옷자락이 날릴것만 같이 아름답게 조각되어있으며

본존불은 손을 잡으면 따뜻한 체온, 감슴에 귀를대면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려올것만 같습니다.

 

석굴 동편에 특이한 형태의 삼층석탑 있으며,

옛날에는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시원한 감로수가 관광객들의 목을 축여준다.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합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1912~15년에일제강점기때 일차 석굴암보수하는모습

 

 

 

 

 

 

석굴암삼층석탑

인간이 조성한 부처님 아닌 듯, 8세기 중엽 조각기술의 백미”

통일신라의 국력과 기술, 신라인의 불심(佛心)과 재능이 총체적으로 결집되어 탄생한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은 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조성연대가 거의 확실하고, 당대를 대표하는 40여 구의 불.보살상들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불교유적이다.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석굴암 석굴은 같은 대열에 올라 있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의 둔황 석굴보다 한 차원 높은 불교의 정신세계와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 석굴의 위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사진설명: 발견 당시의 석굴암 석굴로 본존 여래상과 금강역사상이 보인다. >

석굴암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인 신라 경덕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김대성이 751년에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시공되기는 했으나, 왕실의 원찰, 혹은 국찰(國刹)로서의 석굴암 창건을 기원한 경덕왕의 후원이 없었다면 완공은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석굴암은 김대성이라는 한 개인이 아닌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룩된 건축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석굴암 변천에 관한 내용은 〈불국사고금창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1703년(숙종 29)과 1958년(영조 34년)에 중수했고, 조선 말기에 와서 조예상이 또다시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실의 원찰 또는 국찰로 명성을 떨쳤던 석굴암의 석굴이 한 동안 세인들의 관심 밖에 있다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한 해 전이었다. 발견 당시의 전후 사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1938년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발간한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책에, 명치 42년(1909), “경주 인사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내용이 단순.모호하여 실상을 아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1909년 한국을 다녀간 독일학자 안드레 에카르트 박사가 처음 발견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경주 인사’가 석굴암을 처음 발견했다는 시기와 에카르트 박사가 한국을 다녀간 시기가 우연히 일치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인사’가 에카르트 박사가 아니라면 최초로 석굴암 석굴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진설명: 제1차 보수 공사 장면으로 10대 제자상이 해체된 상태로 놓여 있다.>

경주에서 나서 평생을 고적답사와 신라 문화재발굴에 평생을 바친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 선생은 석굴암 석굴 발견의 자초지종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둘러싼 석벽에 10대 제자 조각상 도열

인도 아잔타.중국 둔황석굴보다 우수

일제의 무모한 보수로 누수 등 부작용

해방후에도 방치하다 1961년에야 관리

“석굴암 석굴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한일합방 직전인 통감부 시대의 어느 경주 우체부였다. 그날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불국사를 거처 토함산의 동산령(東山嶺)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우편배달을 가던 이 우체부는 범곡(凡谷)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 문이 있고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들여다보니 돌부처가 많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우편배달을 마치고 3, 4일 뒤에 돌아 온 그는 이 사실을 우체국장에게 알렸다. 일본말이 서투른 그는 ‘돌사람(이시노히도)’이 굴속에 하나 가득 차있다고 설명하니 우체국장도 놀랐다. 얼마 후 당시의 군수 양홍묵을 비롯하여, 부군수, 고적 애호가, 금융조합 이사, 사진사 등 일본인들이 현장 답사를 했다. 석굴의 존재 사실을 보고받은 초대 통감 소네 아라스게(曾根荒助)가 경주로 찾아와 석굴을 직접 둘러봤다. 합방이 된 후에는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와보았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서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는 명을 내렸다. 과연 청부업자들이 내려왔으나 모두 데라우치를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총독부는 1913~15년에 제1차 보수 작업을 시작했다.”(동아일보, 1961년 11월1일자 기사 참조)

석당 선생이 말한 ‘경주 우체부’가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말한 바로 그 ‘경주 인사’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석굴암 석굴 발견 이후 총독부가 1차 보수 작업을 시행했으나 시멘트를 과도하게 사용한 관계로 습기 발생에 의한 풍화작용 등 다른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일제는 1917년 7월에 2차, 1920~1923년에 제3차 보수 공사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수.침수.결로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불상에 이끼가 끼는 등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진설명: 보수공사 후의 석굴암 석굴로 입구 양쪽 벽을 큼직한 사괴석으로 축대 쌓듯이 처리한 모습이 어색하다.>

일인학자들도 솔직히 인정했듯이 수리 공사 후 석굴암 석굴은 원형과 많이 달라졌고, 보수작업은 오히려 고적을 오손하는 결과만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원형이 훼손된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처음 공사 전까지 있었던 감실(龕室)의 석상 2기와 석굴내의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놓여 있던 대리석 오층석탑이 행방을 감춘 사실이다. 처음 답사에 참가했던 한 일본 사람은 1929년 경주 도청회의실에서 열린 고적 강의에서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훔쳐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우리 정부에 의한 석굴 보존 대책이 수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1년 9월부터 석굴암 보수 및 봉원공사 계획 수립과 동시에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①불상 부식과 침식의 주된 원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시멘트를 남용하였기 때문이고, ②전실(굴 입구의 방) 입구에 기와집이 있었으나 고증을 잘못하여 일본식으로 변조, ‘터널’처럼 만들어 놓았고, ③전실 입구 좌우 면에 있던 2기의 팔부중상을 ‘ㄱ’자로 꺾어 굴 내부를 향하게 변형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보수공사는 침수.결로 방지와 원형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실 입구의 팔부중상을 원래 모습대로 모두 일렬로 세웠으며, 전실 앞에는 순 한국식 팔작집을 짓되, 집 기둥을 비롯한 구조는 충북 괴산 미륵리 절터 등을 참고했다. 당시의 석굴암 석굴 보수?복원공사는 우리나라 문화재관리 역사에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석굴암 석굴에 얽힌 일화들 중에 문화재 보존에 무지를 드러냈던 한 지식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1959년 11월경의 일이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측이 석굴 내부의 불상을 석고로 복제해 본국으로 가져 올 수 있는지 여부를 우리 정부에 물어왔다. 이에 정부는 홍익대학교 조각과 교수인 김경승씨에게 그 가능성을 검토시켰다. 김 교수는 원형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고서도 석고형을 따낼 수 있다고 정식 보고하면서 적지 않은 예산까지 청구했다. 석고상 표면에 얇은 종이를 씌우고 각 부분의 형을 석고로 뜨면 불상을 훼손하지 않고도 복제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관련 학계에서는 석고로 형을 뜰 경우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불상 훼손은 막을 수 없다고 통박하면서 복제 작업 철회를 요구했다. 반대 여론에 떠밀려 석굴암 불상 복제 작업이 취소되었는데, 다행히 그 일은 문화재보존에 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설명: 보수공사 후의 석굴암 석굴로 사천왕상, 금강역사상, 팔부중상이 보인다.>

석굴암 석굴 입구 좌우 석벽에는 팔부중과 사천왕, 금강역사 등의 석상이 문을 지키고 있고, 석굴 주실(主室) 중앙에는 1장 1척이나 되는 본존 여래 석조좌상이 높이 5척의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 본존 위 궁륭천장에는 〈삼국유사〉에서 “석홀삼렬(石忽三裂)”이라고 표현한 ‘세 조각으로 갈라진’ 연판(蓮瓣)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박혀 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본존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석벽에는 보살, 천신, 석존의 10대 제자 등의 조각상들이 시위하듯 서있다. 본존 앞쪽의 좌우 벽에는 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 범천.제석천상이 부조되어 있고, 보살상에 이어서 사리불.마하목건련.마하가섭.수보리.부루나.마하가전연.아나율.우파리.라후라.아난 등 10대 제자상이 도열하고 있다. 본존 뒤쪽 벽면 정중앙에는 정면을 바라보고 서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그리고 벽 위쪽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각 감실 마다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2상이 없어지고 8보살상만 남아 있다. 감실 보살상의 이름은 각각 금강장보살.관음보살.지장보살.유마거사.문수보살.미륵보살.허공장보상(대세지보살).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석가여래 팔상도 

   팔상도 - 여래본행지도라 하며 석가모니의 전기를 여덟 장면으로 집약하여 도상으로 나타낸

             불전도를 말하며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逾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도솔래의상 : 석가모니의 전신인 호명보살이 도솔천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모습.

                     카필라성 마야부인께 입태하는 모습

                     여섯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내려옴

 

 

비람강생상 : 석가 의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모습과 그 의미를 묘사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서있는 마야부인과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모습

                   태자가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서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 왼손은 하늘을, 오른손은 연꽃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하였다는 설화를 그림으로 묘사

                   룸비니를 한자로 람비니로 썼고 이 '람비'를 꺼꾸로 하여 비람으로 불렀음

 

 

 사문유관상 :  궁성의 동서남북 4대문을 나가서 중생들의 삶을 보게된 모습

                    동에서 노인, 남에서 병든자, 서에서 상여와 상복을 입고 슬퍼하는가족들, 북에서 수행자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유성출가상 : 사문유관에서 생로병사의 고뇌를 깨닫고 출가할 결심을 한 이후 그 출가를 실행하는 장면

                   태자의 마음을 잡기위해 부왕이 삼시전을 만들어 향락으로 태자를 즐겁게 하는 모습

                  태자가 백마를 타고 마부 차익과 함께 궁중을 벗어나는 모습

                  제석과 사천왕등 옹호신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오색의 광명이 비치는 모습

                  태자는 출가하고 말과 수레만 환궁하는 모습

 

설산수도상:마가다국 우루밸라 숲에서 고행하는 수도자상을 표현

                  삭발을 하고 왕자의 복장에서 수행자의 옷으로 바꾸어 입슨 장면

                  국왕이 5인의 신하를 보내어 마음을 돌릴것을 청하는 장면

                  태자가 수호하면서 여러 스승을 찾는 장면

                  네란자라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의 죽을 받아먹고 정신을 가다듬어 보리수 아래로 가서 정진하는 모습

                  태자를 모시던 교진여등 다섯 수행자가 태자의 타락을 가리키며 떠나는 모습

                  깊은 명상에 들어 7일째 되는 날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는 장면

 

 

수하항마상 :  싯다르타가 35세 되던 해 깨달음을 이루는 섣달 초여드레 새벽녘을 묘사

                    석가가 성도후 온갖 마군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모습

                   마왕 파순이 마녀들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으로 여래를 유혹하는 장면과 굴하지 않고 이들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의모습을 표현

 

 

녹원전법상 : 녹야원에서 행한 최초설법을 그림. 교진여등 다섯 비구상이 배열

                    주위에는 제석, 법천, 대범, 천룡등 인도 고대신들까지  귀의 배열

 

쌍림열반상 : 순타에게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고 80세에 열반에 들자 불제자들이 슬퍼하는 광경

                   쿠시니가라성 니련선하 언덕의 사라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게 하였으며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둔 상

                   구름을 탄 마야부인이 석존의 열반 소식을 듣고 도솔천에서 하강하니 석존은 잠시 일어나

                   모후를 만나 설법하는 모습

                  임종을 보지 못한 가섭존자가 7일 후에 돌아오자 두 발을 내보이니는 장면과 정법안장을 전하는 모습

                  관을 화장하는 장면과 사리를 분골하여 석존의 사리가 8대국의 국왕들에 의하여 분배되어 간 것을 묘사  

 

*여러 카페에 올라온것을 불자님들 알기쉽게 한곳에 정리하였읍니다

많이 보시고 부디 성불하십시요

'사찰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의 삼보하옵고(1)  (0) 2012.06.01
삼보귀의 하옵고  (1) 2011.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