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석모도 보문사,전등사 순례(2009,10,11)
석모도 가는 선착장
갈매기를 유혹하는 새우깡~~
배에 버스를 함께실고 석모도로갑니다(우리가 타고온 태화관광버스)
보문사일주문앞에서
멀이 눈섭바위를 한번댕겨보고서리~~
극락보전과 보문사경내
와불전
와불
500년된 향나무
강화뻘로 넘어가는 석양을 배경으로~~
강화 해넘이 관경
강화뻘밭
마애불앞에서
강화도 뻘밭을 배경으로 한캇날이고서리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윤장대(輪藏臺)를 기도하며 돌이는 마누라,
윤장대란?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팔각기둥 모양으로 만든 나무 기둥 안에 대장경전을 넣고 돌리며 예불을 보는 불교 의식품으로,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내부에 불경을 보관해 둔 이것의 역할은 부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과 경전이 꽂혀 있는 윤장대를 돌리기만 해도 경전 만권을 읽은 것과 같아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하며 글을 몰라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즉 사람들이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읽는 효과를 얻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정족산 종해루 전등사 일주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대웅전
500년 묶은 은행나무~~
강화도 특산품 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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